김정아 개인전 '푸른 골목의 안쪽'…'남겨진 것들'의 미학

박종진 기자 / 기사승인 : 2026-05-24 18:4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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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풍경 속에서 인간 내면의 기억 복원
토포하우스 6월 7일까지…'소외된 것'의 생명성

[SWTV 박종진 기자] '버려진 것들' 속에서 인간성을 기억하고 회복하는 작업에 천착해온 김정아 작가가 ‘도시의 골목’으로 상징되는 것들에 내재한 깊은 의미를 환기시키는 작업을 선보인다. 서울 인사동 갤러리 토포하우스에서 내달 7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푸른 골목의 안쪽' 이다.

 

▲기다림-바람 2. 65*80cm 캔버스에 아크릴 2014

 

오늘날 도시의 골목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재개발과 도시 정비 속에서 오래된 공간은 끊임없이 지워지고, 사람들의 기억 역시 속도의 흐름 속에 희미해진다.

 

김정아 작가의 전시는 바로 그 사라짐의 감각을 조용히 붙잡으며, 골목을 통해 인간의 삶과 기억이 어떻게 공간 속에 축적되는 지를 이야기한다.

 

김 작가의 작업은 일관되게 ‘중심에서 밀려난 것들’을 향해 있다. 작가는 자신의 노트에서 “오랫동안 주목해온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빛을 잃고 남겨진 것, 관심 받지 못한 장소와 감정들”이라고 적었다. 이는 김 작가 작업의 출발점이자 이번 전시의 핵심이다. 그는 풍경을 그리지만, 실제로는 풍경 속에 남은 감정의 잔향을 그린다.

 

▲ '오후' 80x234 cm 캔버스에 아크릴 2018.2023.

 

그는 화업 초기, 거대한 도시 서울의 중심보다 봉천동, 신림동, 고시촌 주변의 낡은 건물과 비정형적 공간에 시선을 두었다. 화려한 도시의 전면이 아니라 뒷골목과 낡은 벽, 빛을 잃은 사물과 용도를 다한 물질, 사람이 떠난 뒤 남은 장소를 김 작가는 단순한 기록이나 고발로 처리하지 않고 오히려 사라지고 버려진 것들 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감정과 생명성을 찾아냈다. 

 

이러한 시선은 거제도에서 보낸 25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더 깊어졌다. 서울과 물리적으로 멀어지고, 익숙한 관계망에서 떨어져 오롯이 작업에 집중하면서 낡은 건물의 벽체, 빈 들판, 밤의 숲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내면과 맞닿은 장소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푸른 골목의 안쪽’ 전시는 김 작가가 1990년대 서울의 변두리 공간에서 시작해 거제도의 바다와 숲, 해양 플라스틱 작업, 그리고 다시 골목의 내면으로 이어온 긴 회화적 여정의 한 결산으로 읽힌다.

 

▲김정아 작가가 '푸른 골목의 안쪽' 전시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 작가는 버려진 것들 안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의 조건을 찾아낸다. 그의 작업에서 아름다움은 완전하고 깨끗한 것, 중심에 놓인 것이 아니라 시간에 닳고, 관계에서 밀려나고, 쓸모를 잃고, 빛바랜 것들이 오히려 깊은 정서를 갖는다. 김 작가에게 아름다움은 상처와 소외, 허무와 공허를 통과한 뒤에 드러나는 감정이다.

 

정석도 미술평론가는 이러한 김 작가의 미감을 “이질적이고 소외된 시간에 함축된 미적 정감”으로 설명했다.

 

전시 제목은 ‘골목’을 말하고 있지만 그 안쪽에는 단순한 도시 풍경 이상의 세계가 놓여 있다. 오래된 건물의 모서리, 인적 드문 길, 밤의 숲, 바다에서 건져 올린 플라스틱 조각, 버려진 사물의 색과 표면까지 김 작가가 지난 시간 동안 응시해온 대상들이 서로 이어진다. 이들 대상은 빠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해 뒤쳐진 것들이거나 쓸모를 다해 버려진 것들로 작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초상과 닮아있다”고 말한다.

 

▲ '밤의 숲’ 72x194(cm) 캔버스에 아크릴 2020

 

전시 제목에 들어간 ‘푸른 골목’은 단순한 색채적 표현이 아니라 어둠과 기억, 고독과 위로가 뒤섞인 정서의 색이다. 특히 펜데믹 시기에 만난 ‘밤의 숲’은 김 작가에게 깊은 위로의 공간이 되었고, 그는 작가노트에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의 숲은 묵묵히 옆을 지켜주는 친구처럼 존재했다”고 썼다. 그는 그 무한한 깊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리고 덮고, 다시 드러내는 과정을 통해 장소의 표면 아래 숨어 있는 시간을 건져 올린다.

 

전시작에서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은 골목. 만화방, 당구장, 유리가게 등은 한 세대 전만 해도 전국 어느 동네에서나 마주쳤던 것들이다. 그러나 건물은 뼈대만 남았고, 문도 유리도 사라진 채 앙상한 그림자만 길게 바닥에 누워있다. 초승달과 비치볼이 작품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독특하다.

 

뼈대만 남은 건물의 그림자는 김 작가의 작업에서 매우 중요한 ‘시간의 구조물’이다. 단순한 폐허가 아니라 한때 사람들의 삶과 관계가 머물렀지만 지금은 비어버린 시간의 흔적이다.

 

특히 건물의 내부가 비어 있거나 뼈대만 남아 있다는 점은 관계와 기능을 상실한 뒤 비로소 드러나는 존재의 본질에 가깝다. 이는 김 작가가 오래전부터 “사물은 실용성과 관계성을 탈피했을 때 비로소 독립된 존재가 된다”고 말해온 것과 연결된다. 즉, 건물은 무너졌기에 오히려 인간 삶의 기억을 더 강하게 드러낸다.

 

초승달은 완전한 빛이 아니라 아직 차오르지 않은 상태의 빛으로, 완성과 충만보다는 결핍과 기다림, 고독과 회복 가능성을 암시한다. 김 작가가 다루는 ‘남겨진 것들’의 세계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희미한 희망 혹은 내면의 작은 생명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읽힌다. 

 

▲푸른 골목의 안쪽, 95x155cm, 캔버스에 아크릴 2021

 

'푸른 골목의 안쪽'에서 관람객은 화려한 장면보다 조용한 표면을 만나게 된다. 인물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골목, 어둠이 내려앉은 벽, 푸른빛이 스며든 길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설명되지 않는 침묵 속에서 관람객은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김 작가의 그림은 작가의 장소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관람자의 장소를 열어준다.

 

무엇보다 그의 작업은 ‘보는 그림’이라기보다 ‘머무는 그림’에 가깝다. 관람자는 골목의 푸른 그림자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기억 속 오래된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결국 '푸른 골목의 안쪽'은 사라져가는 도시 풍경을 기록하는 전시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 속에 남겨진 감정의 흔적을 불러내고,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 속에서 인간이 잃어버린 느린 감각과 기억의 깊이를 다시 되묻게 한다. 

 

사물은 쓸모를 잃은 뒤에야 비로소 자기만의 시간을 드러낸다. 그 시간을 바라보는 일이 김 작가의 회화이고, 이번 전시가 관람객에게 건네는 가장 깊은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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