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TV 편집국] 안전보건공시제가 지난 8월부터 시행됐다. 이는 상시근로자 500인 이상 기업과 연간 공사액 1200억원 이상의 건설사 등이 안전보건 관리 현황과 산업재해 통계, 안전 투자 규모를 대중에게 공개하도록 의무화한 제도로, 산업 현장의 투명성을 높여 사고를 예방하겠다는 취지다.
문제는 제도가 기업을 실질적 위험 제거가 아닌 서류상의 완벽함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안전관리 역량보다 공시 수치가 기업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면 현장을 바꾸려는 노력은 뒷전으로 밀리고 보기 좋은 지표를 만드는 일만 남게 된다.
| ▲ 지고은 자유기업원 인턴연구원. |
이같은 우려는 기우가 아니다. 지난 2023년 기준 근로자 1만명당 사고 사망자 수를 나타내는 사고사망만인율은 0.39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0.29를 웃돌았다. 산업안전 규제가 잇따라 강화됐는데도 사망사고가 좀처럼 줄지 않는 현실은 규제의 양과 안전의 질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안전보건공시제 역시 이 오래된 역설을 되풀이할 가능성이 있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공시제가 불러올 ‘낙인 효과’다. 건설업과 제조업처럼 업종 특성상 사고 위험이 높은 기업은 산업재해 수치만으로 안전관리가 부실한 기업이라는 평가를 받아 투자 시장에서 외면당할 수 있다.
업종과 작업환경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수치는 기업의 안전 수준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그럼에도 공시 결과가 기업 평가와 투자 판단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면 기업은 실질적 안전 투자보다 수치를 보기 좋게 포장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다. 위험을 없애야 할 제도가 위험을 숨기도록 만드는 셈이다.
규제 준수 비용의 불평등도 문제다. 공시제와 별개로 지난 6월부터는 사업장 규모와 관계없이 위험성평가를 제대로 실시하지 않으면 최대 10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대기업에는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일지 몰라도 안전관리 전담 인력조차 없는 50명 미만 중소기업에는 사업의 존폐를 가를 만큼 무거운 부담이 될 수 있다.
규제가 공평해 보여도 그 무게까지 공평한 것은 아니다. 중소기업 대표가 낮에는 현장을 뛰고 밤에는 수 백장의 안전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면 정작 위험 요인을 살피고 개선할 여력은 줄어든다. 규제 비용이 생산성을 넘어선 결과는 중소기업의 경쟁력 약화와 공급망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이같은 악순환은 1970년대 영국이 겪은 실패와 닮았다. 영국도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규제와 처벌을 강화했지만 현장의 형식주의만 키웠다. 법이 엄격해질수록 기업은 사고 예방보다 법망을 피하는 데 집중했고, 드러나지 않은 위험은 현장에 그대로 남았다.
영국이 선택한 해법은 법령을 더 쌓는 것이 아니었다. 1974년 산업안전보건법을 제정한 뒤 산업안전보건청(HSE)을 중심으로 현장 전문가가 기업과 함께 위험을 진단하는 체계를 마련했다. 기업이 사업장에 맞는 안전 규칙을 스스로 설계하도록 하되 그 결과에는 엄중한 책임을 지도록 했다. 자율과 책임을 결합한 것이다.
한국의 안전 행정은 여전히 전문성보다 규정에 의존한다. 수 천개의 법령 조항이 현장을 옥죄고 있지만 이를 집행하는 공무원은 2~3년마다 자리를 옮기는 순환보직자로 채워진다. 전문성이 쌓일 틈이 없으니 규제는 날카로운데 집행은 허술하다. 서류는 완벽하지만 현장은 여전히 위험한 모순이 반복되는 이유다.
물론 기업의 안전관리 현황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사고 예방에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는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업종과 기업을 같은 잣대로 평가하거나 서류의 완성도로 안전 수준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공시를 강화하는 것만으로 현장의 위험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기업에 더 많은 서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획일적 사전 규제와 처벌 중심의 방식에서 벗어나 현장 중심의 예방 활동을 지원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묻는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기업에는 위험을 관리할 자율성을 주고 실제 사고와 예방 성과에는 분명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집행의 전문성도 높여야 한다. 순환보직에 의존하기보다 이공계와 산업 현장 경험을 갖춘 안전 전문인력을 채용해 장기간 업무를 맡겨야 한다. 현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규제는 아무리 촘촘해도 사고를 막을 수 없다.
부를 창출하는 기업이 안전이라는 이름 아래 비효율의 늪에 빠져서는 안 된다. 필요한 것은 서류를 쌓는 규제가 아니라 현장의 위험을 없애는 정교한 안전 거버넌스다. 안전보건공시제가 자리 잡기 전에 규제 체질부터 바꿔야 한다. 그래야 ‘서류만 안전한 나라’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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