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대신 칼로 새긴 자연의 소리…강인주, 45년 회화의 세계

박종진 기자 / 기사승인 : 2026-10-05 13:36:36
10월 14~20일 서울 인사아트센터 개인전…캔버스에 쌓인 색과 질감으로 생명의 울림 형상화
구상에서 추상으로 확장된 ‘The Sounds’…조각적 마티에르와 한국적 서정 결합한 독창적 화풍

[SWTV 박종진 기자]붓으로 색을 입히는 대신 나이프로 물감을 밀어내고 쌓아 올리며 자연의 소리를 그려온 강인주 화백이 오는 14일부터 20일까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인전 'The Sounds'를 연다. 40여 년 동안 나이프를 주요 화구로 삼아 독자적인 회화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가 자연과 생명, 인간의 내면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선보이는 자리다.

 

▲The Sounds

 

강 화백의 회화는 일반적인 유화와 제작 방식부터 다르다. 붓이 색채의 번짐과 부드러운 연결을 통해 대상을 묘사한다면, 그의 나이프는 물감을 긁고 밀어내거나 두껍게 올려 화면에 굴곡을 만든다. 캔버스는 평면에 머물지 않고 빛의 방향에 따라 그림자가 생기는 부조적 공간으로 바뀐다. 색채의 중첩과 표면의 요철이 결합하면서 자연의 움직임과 시간의 흔적을 드러낸다.

 

이러한 작업은 단순히 붓을 칼로 바꾼 기법상의 차이에 그치지 않는다. 강 화백에게 나이프는 눈에 보이는 풍경을 재현하기 위한 도구이면서 동시에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와 생명력을 시각화하는 수단이다. 그가 오랫동안 작품에 붙여온 ‘The Sounds’라는 제목 역시 이러한 예술관을 압축한다.

 

산과 강, 들풀과 바람, 햇빛과 계절의 변화는 그의 화면에서 소리 없는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자연을 관찰해 형태를 옮기는 데서 출발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안에 깃든 생명의 기운과 인간이 느끼는 정서를 표현하려는 것이다.

 

▲The Sounds

 

캔버스를 조각하는 칼끝…회화와 부조의 경계를 넘다

 

나이프 회화는 물감을 두껍게 쌓는 임파스토 기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반적인 붓질과 달리 나이프는 물감의 두께와 방향, 절단면을 직접 조절할 수 있다. 칼날의 각도와 압력에 따라 날카로운 선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넓게 밀어낸 색면이나 거칠게 솟아오른 표면이 형성되기도 한다.

 

강 화백은 이러한 물성을 활용해 자연의 굴곡과 생명력을 화면에 담아왔다. 칼끝으로 만든 선들은 때로 들풀의 흔들림이나 물결처럼 이어지고, 중첩된 색면은 산맥의 능선이나 대지의 지층을 연상시킨다.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면 물감의 두께와 방향이 먼저 보이지만,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개별적인 흔적들이 하나의 풍경과 리듬으로 결합한다.

 

그의 작품에서 주목할 부분은 나이프가 만들어내는 강한 물성과 서정적 정서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날카로운 도구로 완성한 화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자연의 평온함과 인간적인 온기를 전한다. 거친 질감이 반드시 격렬한 감정을 뜻하지 않으며, 단단한 표면이 오히려 섬세한 생명의 움직임을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The Sounds

 

강 화백이 나이프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계기에는 자연과의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과거 산길을 걷던 중 외진 곳에 핀 들꽃을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추위를 견뎌온 작은 생명의 존재를 새롭게 느꼈고, 이후 자연의 내면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나이프 작업에 몰두하게 됐다.

 

그는 지난해 개인전을 앞두고 자신의 화업을 돌아보며 “나이프는 나의 운명이었고, 캔버스는 나의 사랑이며, 나이프와 캔버스는 나의 눈물과 삶이다”라고 밝혔다. 나이프가 단순한 화구를 넘어 삶과 예술을 연결하는 수단이 됐음을 말해준다. 강 화백의 작품에서 나이프는 제작 도구의 특이성뿐 아니라 화면의 질감과 색채, 조형적 리듬에서 차별성을 확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The Sounds

 

한국적 풍경에서 우주의 울림으로…구상과 추상의 확장

 

강 화백의 작품세계는 초기의 구상적 풍경에서 점차 추상적 조형으로 확장돼 왔다. 고향의 산천과 들판, 강가의 풍경, 어머니와 가족의 모습이 중심을 이루던 시기에는 한국인의 정서와 공동체의 기억이 화면에 짙게 배어 있었다.

 

2000년대 이후에도 이러한 향토적 정서는 이어졌지만, 자연의 구체적인 형상을 묘사하는 것보다 색채와 선의 움직임을 통해 생명의 기운을 표현하는 비중이 커졌다. 나이프로 긁고 쌓아 올린 물감의 흔적은 산과 나무, 강물의 형상에서 벗어나 바람과 소리, 우주의 순환을 암시하는 추상적 이미지로 발전했다.

 

▲The Sounds


강 화백의 최근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추상적 변화는 이 같은 정서적 토대 위에서 이뤄졌다. 화면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선과 색면은 구체적인 대상을 설명하기보다 관람자가 스스로 자연의 소리를 상상하도록 이끈다.

 

그는 앞선 전시에서 “우주와 생명의 소리는 무궁하고, 이것을 감상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작가가 구상에서 추상으로 표현 영역을 넓혀온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 강 화백의 나이프 회화는 한국적 서정과 현대적 조형언어가 결합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그 속에 깃든 시간과 감정,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두꺼운 물감의 층으로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The Sounds

 

이번 개인전은 강인주가 오랫동안 추구해온 ‘보는 소리’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는 자리가 될 전망이다. 관람객은 칼끝으로 형성된 화면의 굴곡과 색채의 흐름을 따라가며 자연의 모습뿐 아니라 작가가 그 안에서 발견한 삶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강 화백이 나이프로 캔버스에 새겨온 것은 결국 자연의 외형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생명의 움직임이다. 날카로운 칼끝에서 출발한 선과 색이 부드러운 자연의 울림으로 바뀌는 과정, 그것이 강인주 회화의 독창성이자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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