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TV 스포츠W 임가을 기자] 김신록이 120분간 무대 위에서 겪는 처절한 생존기 ‘프리마 파시’를 만들어 간 과정과 노력, 그리고 의미에 대해 말했다.
연극 ‘프리마 파시’에서 ‘테사’ 역을 맡아 활약 중인 김신록은 최근 서울 종로구 서촌 소재의 카페에서 국내 언론들과 라운드 인터뷰 자리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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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저스트엔터테인먼트 |
‘프리마 파시’는 누구보다 법을 꿰뚫고 승소만을 쫓던 변호사 ‘테사’가 성폭행 피해자가 되어 법과 맞서 싸우는 782일의 여정을 그린 연극이다. 인권 변호사 출신 극작가 수지 밀러가 탄생시킨 작품으로, 2019년 호주에서 초연된 이후 영국 웨스트엔드, 미국 브로드웨이를 강타하고 올해 한국 초연을 올리게 되었다.
김신록은 작품의 첫인상에 대해 “뼈대가 선명한 작품이고, 하고자 하는 말이 선명하다고 느꼈다”고 말하면서도, “하지만 들여다볼수록 다양한 결로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작품이라 연습 과정이 어려웠다”며 그 이유로 작품이 처음 공개된 2019년과 현재의 차이점을 말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젠더를 아우를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2019년에 공연됐다면 가해자와 피해자를 훨씬 더 선명하게 가르는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구조와 세계에 관한 이야기로 나아가서 우리가 어떤 세계를 꿈꿔야 더 다정하고 안전하면서 함께 어울려 살 수 있는 체계가 될지 질문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작품은 공연 소식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된 작품으로, 그 중의 가장 큰 이유는 흔치 않은 여성 1인극이라는 점에 있었다. 120분간 여성 배우가 무대를 홀로 채우는 작품의 주인공이 누가 될지 많은 관심이 쏠렸고, 기대에 걸맞는 캐스팅 라인업이 공개되었다.
‘프리마 파시’를 완성한 세 명의 배우는 각 분야에서 정점을 찍은 배우들이다. 2004년부터 20년 넘게 연극 무대에 올라온 김신록과 함께 판소리, 뮤지컬 계를 주름잡고 있는 이자람, 차지연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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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쇼노트 |
김신록은 “세 배우가 연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무대에 서 왔던 역사가 달라서 구사하는 방식과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이 다르다”며 이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어간 과정을 전했다.
“예전 같았으면 배우들 간의 톤을 맞추고, 연출의 연기론을 배워서 구현해 내려고 했을 텐데 이 작품에서는 각자의 방식이나 무기를 구사할 수 있게 자유가 있었다. 어떠한 정답을 향해 통일해야 하는 게 아니고 각자가 탐구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결하게 하는 게 ‘프리마 파시’의 주제하고도 잘 맞는 것 같다.”
한 명의 배우가 온전한 작품을 책임지는 1인극답게 배우들만의 디테일이 두드러지는 점 역시 이 작품의 특징이다. 이에 김신록은 “배우들의 흐름, 내용과 맥락은 다 똑같다. 하지만 번역이다 보니까 원문을 어떤 말로 전할 것인지에 대해 자유를 주셨다”며 본인이 영어 대본을 한국어로 옮기는데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을 밝히기도 했다.
“저는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핵심 키워드가 반복되는 걸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똑같은 영어 단어를 동일한 방식으로 번역해서 맥락을 형성해 내는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 또 ‘프리마 파시’가 좁게는 성폭력 법의 개선을 요구하는 작품이지만, 넓게는 이 세계를 이분법으로 나누고, 논리와 이성에만 집중하는 인간 중심주의를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맥락으로 열릴 수 있는 키워드를 챙기려고 했다.”
앞서 수많은 연극 작품에 참여해 온 김신록은 뇌사 판정을 받게 된 19살 청년의 심장 이식 과정을 그린 1인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이처럼 그간 참여하고 봐온 다른 1인극과는 차별화되는 ‘프리마 파시’의 특징에 관해 묻자, 그는 1막과 2막의 세계관이 완전히 다른 점을 짚었다.
“1막의 세계가 철저히 무너지는 것이 2막이다. 그 무너진 세계 안에서 발버둥 치다가 마지막 순간에서야 겨우 새로 다져진 땅 위에 일어서게 되는 것 같다. 두 개의 대비되는 세계관을 동시에 연기한다는 것이 가장 다른 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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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쇼노트 |
작품의 주인공 테사는 법정이라는 같은 공간에서 완전히 다른 두 세계를 경험한다. 논리와 이성, 법에 대한 신뢰를 갖고 영국 노동 계급(working class) 출신 여자가 개인의 힘으로 구조를 뚫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던 테사는 1막에서 ‘성공하는 세계’를 향유하지만, 2막에서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세계’를 만나게 된다.
이에 대해 김신록은 “논리적이면서 이성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해도 미끄러지고, 지난 기억으로 멱살을 잡혀 끌려 들어가는 일이 계속 무대에서 펼쳐진다”며 단순히 무대에서 실패하는 척하는 것이 아닌, 계속해서 실패를 경험하기 위한 장애 요소로 대본의 구조를 예시로 들었다.
“2막은 테사가 일관되게 진술할 수 없는 세계를 그려놨다. 증인 대기실에 도착했는데 그날의 경찰서로 되돌아가고, 겨우 법정에 섰는데도 검사의 첫 질문에 가해자를 마주쳤던 때로 돌아가 버리는 식으로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따라서 어떻게 내 발로 기억에 걸어 들어가는 게 아니라, 틈입해 오는 기억에 휩쓸려가는 식으로 연기할 수 있을 지 고민했다.”
이러한 테사의 세계가 변화하는 건 1인칭으로 서술해 나가는 대사에서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김신록은 “1막은 테사가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세상의 주체라면, 2막은 테사가 주체로 서려고 해도 계속해서 휩쓸려가는 비커밍(becoming)의 세계”라고 말했다.
“1막에서는 ‘내가 커피를 마셔’ 같이 ‘내’가 앞에 온다면, 2막에서는 ‘이건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와 같이 세계가 앞서고 그걸 인지하는 ‘내’가 뒤에 따라오게 된다. 번역할 때도 이걸 집중적으로 살려보려 했다.”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테사가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즉 ‘프리마 파시’라는 작품 전체가 테사의 경험이며 증언인 셈이다.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범죄와 그로 인한 상처를 말하는 작품인 만큼 이를 연기하는 배우로서는 어깨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이에 “서술할 때 테사라는 정체성을 갖는 만큼 당사자성을 가지려고 하는 작품”이라고 전한 김신록은 작품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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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쇼노트 |
“2막에서 테사가 ‘강간 사건의 피해자이자 생존자로서 말씀드린다’고 말하는데,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내가 어떠한 인물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할 수 있는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분들이 이 무대를 봤을 때 내가 얼마나 진정성을 가져야 이 말을 숨지 않고 해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내 입으로 그것을 부끄럽지 않게 발화할 수 있는 데까지 이 대본을 소화해야 하고 사유해야 한다는 결벽이 있었다. 지금도 많이 미흡하겠지만, 어떻게 부끄럽지 않게 가닿을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다.”
오직 승소를 위해 성폭행 피해자를 집요하게 몰아붙이고, 증언의 맹점을 찔러 ‘법 게임’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던 테사가 성폭행 피해자로서 법정에 서기까지 총 782일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다. 이 모든 과정을 무대 위에서 홀로 견뎌내는 김신록은 커다란 테이블을 직접 밀어서 돌리며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여정을 이어간다.
“작품을 만들면서 1막 끝나고 퇴장했다가 들어와야 하지 않냐는 의견도 있었고, 퇴장하지 않더라도 무대를 정리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합의를 본 건 이 무대에서 테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스스로 해냈을 때 갖는 힘이 있고, 모든 걸 헤쳐 나가서 이르게 되는 세계 또는 생존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저도 뒤로 갈수록 체력적으로 힘들고, 테이블을 미는 게 점점 힘들어지는데, 마지막에 그 위에 바로 서면서 끝나니까 이게 바로 생존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1막과 2막이 분명히 나뉘지만, 인터미션이 존재하지 않고 배우는 무대 위에서 퇴장하지 않는 점도 이 작품의 큰 특징이다. 이날 인터뷰에서 김신록이 직접 읽어준 ‘프리마 파시’의 대본에는 이에 관련해 ‘(파트 1의) 마지막 씬과 이어질 씬 사이에 시간과 공간이 존재한다. 인터미션이 아니라 단지 분위기가 변환된 공간이다’라는 지문이 적혀있었다.
“조디 코머가 영국에서 공연할 때는 5분 정도의 퇴장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 시간 동안 스태프들이 나와서 무대를 정리하고, 배우는 의상을 갈아입고 등장한다는 걸로 알고 있는데 저희는 무대 위에서 옷 갈아입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좋은 것 같다. 연극적으로는 무대를 치우고 옷을 갈아입는 사이에 782일이 지나는 거지 않나. 이 브릿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는데 이 과정을 찾아낸 순간이 굉장히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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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저스트엔터테인먼트 |
연극 무대에서 주로 활약해 오던 그는 드라마 [괴물], [지옥], [재벌집 막내아들], [무빙], 영화 ‘전,란’ 등에 출연하며 활동 반경을 넓혔다. 김신록은 “매체 연기를 하면서 생긴 무대에서의 기쁨은 연극을 처음 접해보시는 분들도 오시는 것 같다는 점”이라며 브라운관, 스크린과 무대에서 동시에 활약하며 얻은 것을 전하기도 했다.
“제 공연에는 남녀 커플도 많이 오고, 나이 드신 분들도 꽤 앉아 계신다. 오히려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때보다 남자 관객도 많다. 어떻게 오시는 걸까 궁금했는데 TV나 영화에서 본 저를 실제로 보고 싶어서 오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런 분들한테 좋은 공연을 보여드릴 수 있어 정말 기쁘다.”
매체와 무대의 가장 큰 차이점은 관객을 직접 만나 소통하고 호흡한다는 점에 있다. 무대 위에서 실시간으로 관객들의 반응을 지켜보는 그는 “많이 우시고, 같이 버텨주신다는 걸 느낄 수 있다”며 관객들과 형성한 유대감에 대해 말했다.
“2시간 넘는 시간 동안 자기 경험에 빗대어서, 혹은 무대 위에서 큰일을 당하고 그걸 겪어 나가는 사람에 대한 연대로서든. 신체·정신적으로 공감과 지지를 보내신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특히 커튼콜 때 너무 느낀다. 연기를 잘했고 못 했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힘들고 중요한 이야기를 열과 성을 다해서 고맙고 공감한다는 걸 몹시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게 느껴져서 감사하다. 마지막 테사가 일어나 두 발로 서는 순간, 그리고 불이 켜지고 다시 배우로 돌아왔을 때 다 함께 짧은 고별을 나누고 헤어져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한편 ‘프리마 파시’는 오는 11월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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