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TV 스포츠W 임가을 기자] ▷ 전편에서 이어집니다
※ 본 인터뷰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래 아이들이 가하는 잔인한 괴롭힘이 오스카의 깊은 고독을 만드는 데 일조했지만, 이를 치유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심한 태도로 상처를 남긴 주위 어른들에게 있었다.
오스카의 환경을 바탕으로 천우진은 첫 리딩 연습 당시 매우 어두운 소년을 연기했지만, 해외협력 연출인 루크 커너핸에게서 다른 방향의 피드백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를 받아들인 천우진은 한층 희망적인 오스카의 이야기를 끌어나갈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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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신시컴퍼니 |
“해외 협력 연출님이 어른들의 무심한 신경을 신경 쓰지 말고 어떤 방식이 됐든 오스카의 순수한 마음을 계속해서 지켜나가려 노력하라 말씀해 주셨어요. 그 피드백을 듣고 나니까 오스카가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어른들이 상처를 줘도 용서할 수 있고, 또 용서했기에 더 빛날 수 있으면서 순수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닐까 싶었어요. 그 이후부터는 외롭고 어두운 면보다는 밝아지려고 노력하는 면을 더 보게 됐죠.”
이처럼 차가운 세상 속 애정과 보살핌에 목말라 있던 오스카 앞에 나타난 일라이는 어색한 말투와 기이한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홀로였던 아이에게 주저 없이 손을 내밀고 다가간다. 천우진은 “오스카에게 일라이는 곧 세상”이라며, 자신이 무대에서 마주한 일라이에 대해 말했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오스카에게도 같은 이유가 적용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공연을 하면 할수록 일라이의 눈동자를 통해 이 작품을 기억하게 돼요. 그래서 ‘렛미인’이라는 세계 자체가 저한테는 일라이인 것 같아요.”
허락 또는 초대를 받아야만 인간의 공간에 발을 들일 수 있는 뱀파이어의 규칙 또한 오스카에게는 한없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렛미인’(Let me in)이라는 타이틀이 너무 감동적”이라고 말한 천우진은 우연이지만 아름답게 맞물린 두 인물의 상호작용에 대해 말했다.
“오스카의 주변 인물들은 오스카의 허락 없이 마구 폭력적으로 침범하잖아요. 심지어 모두가 무심하게 상처를 남기고 떠나는데 일라이는 오스카를 해하지 않을 게 분명한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들어가도 돼?’라고 물어봐 주는 게 너무 상냥한 방식이에요.”
따라서 오스카는 눈앞에서 두 번의 학살극을 목도하고도 자신의 모든 걸 버리고 일라이와 함께 떠난다. 천우진은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무대 위에서 공연할 때 느끼는 감상을 바탕으로 풀어놓기도 했다.
“경찰이 죽고 난 다음 일라이와 대사할 때 속으로 ‘무서워’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는데, 그러다가도 일라이가 제 앞에 마주 섰을 때 그 눈빛을 보면 마지막에 같이 안 떠날 수가 없어요. ‘네가 나를 무서워하는 걸 이해하고, 그래서 나는 떠나야 해. 근데 나는 너의 두려움도 충분히 이해하고 담고 안아줄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으로 저를 바라봐 주거든요. 또 모든 것들이 나를 구해주기 위한 행동들이니까요. 자연스럽게 떠날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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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신시컴퍼니 |
인생의 구원자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무거운 관계인 만큼, 이들 사이에 형성되는 감정도 단순한 연정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 천우진도 오스카와 일라이의 사랑을 쉽게 정의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어떠한 감정을 느낄 때 그 감정의 이름을 아직 모르니까 느끼는 감정 자체로 받아들이고 경험하잖아요. 그래서 본인은 아직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오스카한테도 일라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붙인 대상보다는 그냥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인 것 같아요. 연애적인 의미의 사랑, 그 이상을 경험하고 있는 대상이 일라이라고 생각해요.”
기차를 타고 함께 떠나는 이들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이라 할 수도 있지만, 씁쓸한 여운이 남는 건 오스카가 걸친 옷이 일라이를 사랑하며 홀로 늙은 인간 하칸의 옷이었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여러 번 하칸과 오스카를 겹쳐보는 연출이 등장하는 만큼 과연 오스카가 미래에 하칸이 되지 않을 수 있을지에 대한 해석은 관객마다 다르지만, 천우진은 오스카와 일라이의 밝은 미래를 예상하며 함께 떠나는 마지막 장면을 언급했다.
“오스카와 같이 기차를 타고 떠나는 게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관계야’라고 선언하는 장면 같았어요. 전에는 어떤 감정인지 잘 몰랐지만 나는 이제 내 옆에 있는 존재를 위해서 희생을 감수할 수 있고,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지 않을까 싶었죠. 그리고 어쨌든 둘이 어둠 속에 있다가 나온 과정에 관한 이야기니까 더 희망차게 그리는 것 같아요.”
또 그는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사람과 나누면서, 각자의 경험과 시간에 따라 관점이 확실히 다르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고 덧붙여 말했다.
“작업하면서 아빠랑 대화를 많이 했는데 아빠는 나이가 들면서 느끼는 무력감, 삶의 궤적에서 켜켜이 쌓여가는 좌절감을 분명히 느낀 적이 있으셔서 일라이와 오스카의 딜레마가 너무 인상 깊게 다가왔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저는 아직 아빠와 같은 경험을 해 보지 못해서 이 관계와 장면을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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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신시컴퍼니 |
2004년생, 갓 스무 살을 벗어난 나이로 ‘렛미인’ 팀 중 가장 막내인 천우진은 동료들에 관한 질문에 답변을 내놓을 때면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일라이와의 로맨스 연기가 가장 걱정을 많이 했던 부분이었지만, 배우들과 빠르게 유대감을 쌓는 걸로 쉽게 해결됐다고 말한 그는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춘 ‘일라이’ 역의 권슬아, 백승연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슬아 누나가 연습하는 모습들과 과정들을 보면서 작업에 참여할 때 배우로서 어떤 태도로 연습을 마주해야 하는지 많이 배웠어요. 슬아 누나는 정말 성실해서 매 연습에 어떻게 시도해 보고 변화해 볼지를 적어서 와요. 그걸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시도하려고 매일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본받으려고 노력했죠. 승연 누나랑은 연극의 모든 과정과 작업하면서 배우게 되는 하나하나를 공유했어요. 공교롭게도 오디션 때 연기 파트너였는데 둘이 엄청나게 긴장해서 초면인데도 손잡고 서로 격려했었죠. (웃음) 연습 들어와서도 둘 다 연극 첫 작품이니까 산더미 같이 걱정을 끌어안고 왔는데, 생각보다 잘 되니까 같이 헤헤 웃기도 했어요.”
또 천우진은 권슬아와 백승연이 같은 인물인 일라이를 연기하지만, 극과 극의 성향이라고 표현하면서 무대 위에서 마주하는 두 명의 일라이에 대한 인상을 설명했다.
“처음 리딩할 때 연출님이 너무 서로를 통해 구원받는 관계로 틀을 잡지 말고 장면마다 구체적으로 바라보라고 하셨어요. 1막의 장면들은 서로를 할퀴고 꼬집는 ‘혐관’ 로맨스와 같은 방향으로 가면 더 재밌는 이야기가 꾸려질 거라고 하셨죠. 그런 맥락에서 슬아 누나의 일라이는 몇백 년을 산 일라이 같은 느낌이 강해서 적극적으로 무너뜨리고 싶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요. 반면 승연 누나의 일라이는 몇백 살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녀의 연약함이 있어서 왠지 모르게 보듬어주고 품어주면서 연기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죠. 그래서 슬아 누나의 일라이랑은 초반에 친구처럼 과감하게 관계를 형성한다면, 승연 누나의 일라이랑은 좀 더 조심스럽고 찌릿찌릿한 감정으로 마주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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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신시컴퍼니 |
‘렛미인’ 팀과 돈독한 우애를 쌓은 만큼, 첫 작품인 ‘빌리 엘리어트’를 함께한 동기들과도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지를 묻자 “큰일이 있을 때 무조건 공유를 하는 편”이라면서, “이제는 일상을 같이 나누지 않음에도 서로 기쁜 일이 있을 때 축하해 주고 격려해 준다”는 근황을 전했다.
“저희가 한 번 꿈을 이뤄보긴 했지만, 앞으로 꿈을 또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청년들이잖아요. 그래서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알게 모르게 서로 지지하고 응원해 주고 있어요. 작년에 (성)지환이가 영국 유학을 가서 공연을 못 보러올 줄 알았는데, 공교롭게도 한국에 들어와서 마지막 날 다 같이 보러 온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마찬가지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천우진은 이번 작품을 통해 연극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지만, 자신의 직업을 배우로 한정짓지 않았다. 최대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목표인 셈이다.
“예고를 진학하고 대학교를 진학할 때도 내가 무용과를 가서 무용수가 될 것인지, 연기과를 가서 배우가 될 것인지를 골라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항상 답답함을 느꼈었어요. 이번 작업을 하면서 제가 하고 싶었던 것, 그리고 앞으로 하고 싶은 게 그 두 가지에 국한된 영역은 아니라는 걸 구체적으로 깨달은 것도 있어서 뭐가 제 직업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정해진 건 없지만, 공교롭게도 ‘빌리 엘리어트’랑 ‘렛미인’의 공통점이 움직임과 이야기인 만큼, 앞으로도 움직임을 통해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작업에 관심을 두고 활동하고 싶어요.”
끝으로 천우진은 ‘렛미인’ 오디션에 합격한 직후 연습노트 맨 앞장에 적어놨던 글귀를 인용해 관객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한동안 제 마음의 불씨가 다 꺼져버린 줄 알았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작품 연습을 준비하다가, 문득 꺼졌다고 여겼던 마음의 불꽃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완전한 충족감을 주는 건 아니었지만, 그 희미한 알아차림이 한순간 제 안의 공허를 따뜻하게 채워주는 걸 경험했어요. 그래서 저와 마주 보고 있는 관객분들도 이 공연을 통해 마음속 어딘가에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를 발견하고, 그 온기를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생각했습니다. ‘렛미인’은 그런 불씨를 비춰줄 수 있는 작품이니까요. 꼭 놀러 와 주세요.”
한편 ‘렛미인’은 오는 8월16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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